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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사건의 발단

1947년, 3월 1일

삼일절 28주년을 맞아 좌파 진영의 제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곳곳에서 기념집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삼일절’이라는 의미는 매우 뜻깊기 때문에 분위기 자체도 밝은 느낌이었다고 하는데요.

이 때 출발하는 군중 시가행진 도중 광장에서 구경하던 한 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치여 다치는 사고가 납니다.

기마경찰이 사과없이 지나가려 하자

군중들은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경찰을 쫓아갔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들이 쫓아오던 군중에게 총을 발포해

총 6명이 죽고 6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다친 환자들은 도립병원으로 이송이 되지만,

도립병원 부상 동료를 경호하기 위해 있던 경찰이 소총을 난사해 행인 2명이 중상을 입습니다.

이 사건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됩니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이런 경찰의 발포에 항의를 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 문제로 95%정도의 많은 직장인들이 총파업에 들어가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이 때는 통일정부와 단독정부 수립 문제로  외국군이 주둔해 있었던 때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미군 쪽에서  진상조사단을 파견해 조사에 나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은 이것이 ‘좌익단체에 동조자’ 혹은 ‘좌익단체에 거점을 두고 있다’고

하며 탄압을 하는데요.

제주도를 ‘Red-Island’라고 하며 시위에 참여한 도민들을 잡아서 고문시키고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 사건은 심지어 정부 수립과 맞물려 진정될 틈 없이 커져만 가게 되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무차별적인 학살이 시작됐습니다.

 

총알이 아깝다며 죽창으로 찌르고 무차별적으로 죽입니다.

심지어는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숨이 붙어있다며 불 구덩이 속으로 다시 몰아넣었습니다.

임신한 여성들의 아이도, 뜨겁게 달군 쇠막대기기를 이용해 찔러 죽이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약 9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무차별 적인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희생자 신고 접수에 의하면 약 1만 4000여 명 정도가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카운트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더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예측됩니다.

 

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어야 했고, 희생되어야 했을까요?

 

이런 이유로 역사는 꼭 알고 그리고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야 반복하지 않기 때문인데요.

 

왜 그랬는지 확실한 진상규명, 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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